조선의 풍류 - 단양 8경
지난번에는 남명 조식의 휴식처 함벽루에서 대포(막걸리)한잔 걸치며 운치를 맛 보았고,
이번에는 신선들이 내려와 학과 함께 즐기며 놀았다는 단양 8경, 그리고 강선대(降仙臺).
퇴계 이황과 단양 기생 두향(杜香)과의 사랑이야기, 그 사연을 더덤어 봅니다.
단양 8경중 하나인 구담봉에서 남한강 지류인 하류쪽으로 바라다 본 모습입니다.
조선제일의 지성인이자 주자학의 거두인 퇴계와 두향과의 사랑을 간직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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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가 부임후 단양의 아름다운 명승지를 일일이 돌아보고 지명을 명명하게 되는데,
" 어느 날 옥순봉을 유람차 돌아보는 길에 같이 따라간 관기가 바로 두향이였다. " 라고
퇴계의 문집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그와의 로맨스는 사실일 것이다.
이때, 두향의 나이 18세로 詩, 書에 능하고 가야금을 잘 다루는 매우 총명한 관기였다.
그동안 두향은 부화(富華)한 시정잡배나 코답지근한 부유들,
즉, 썩은 선비들과 놀아야 했던, 거미줄에 맺힌 이슬같이 여린 두향에게
드디어 동방 최고의 선비가 나타난 것이다.
첫눈에 반해 그를 사모했지만, 워낙 처신이 풀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선비라
한동안 두향이는 애간장을 다 녹였으리라 ................. 중 략 .................
< 옥순봉 전경 - 충주댐 건설로 유람선이 떠 다난다 >
당시 옥순봉은 풍기군에 속해있어, 두향이 퇴계에게 부탁하기를 단양으로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풍기군수가 불청하자, 퇴계는 옥순봉 석벽에 '단구동문' (丹丘洞門) 이라 새겼다.
단구는 풍기의 옛 지명이었지만, 이때부터 옥순봉이 단양 8경의 관문이 되었다.
< 단양 8경 중 하나인 사인암 >
퇴계는 이때 두번째 부인마져 잃고, 둘째 아들마져 잃고 비탄에 젖어 있을때 였다.
그렇게 울적했던 퇴계에게 두향이는 바로 해어화(解語花)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두향이 가야금을 타면 퇴계는 시를 짓고 또 화답하고 ... 이렇게 봄날 같은 시간을 보낸다.
이때 두향이는 퇴계와 주고받은 시문으로 성녀와 같은 고매한 성품의 인격자로 거듭난다.
< 제비가 나는 듯한 형상을 한 제비봉 >
꿈결같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이 10개월만에 믿기지 않는 이별수가 찾아온다.
퇴계의 셋째형 온계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니, 그는 경상도 풍기로 옮기게 된다.
父子나 형제가 같은 지역구에서 근무할 수 없는 상피(相避)제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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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마지막 밤, 술잔을 사이에 두고 두사람은 말이없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연다.
'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
< 死別己呑聲 -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生別常測測 - 살아 이별은 슬프기가 그지 없어라 >
두향은 말없이 눈물을 훔치며 먹을 갈아 애절하고 애절한 시 한 수 썼다.
<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듯 술 다 하고 님마져 가는 구나 !
꽃지고 새 우는 봄 날은 어이할까 하노라 ~ >
이후로 두향이는 기적(妓籍)에서 빠져나와 도담삼봉을 끼고 흐르는 강기슭에서
그동안 흠모했던 임을 그리며 살아가게 되는데 ......
< 안동에 소재한 도산서원 >
그 동안 퇴계는 대제학, 판서 등의 관직에서 물러나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내려와 지내게 된다.
소식을 들은 두향은 사모의 정으로 수석 2개와 매화분을 보내어 그리움을 전하게 된다.
이에 퇴계는 두향에게 매화시 한 수와 안동의 맑은 물 한동이를 답례의 정으로 보내게 된다.
두향과의 이별을 거문고 줄 끊어짐으로 생각하지만, 소식은 듣고 있으니 원망치 말라는 뜻이다.
해서 두향은 차마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매일 정화수로 떠서 정성으로 기원하게 되는데...
어느날 물동이의 물이 검붉게 변하자, 그에게 변고가 닥쳤음을 직감하고 그가 머무르는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새도 쉬어 넘는다는 험난한 죽령고개를 단신으로 넘어서 3일만에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퇴계는 그가 애지중지 하던 "매화분에 물을주라" 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뒤였다.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먼 발치서 발인만 지켜보고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다시 죽령고개를 넘어 단양으로 되돌아 온다.
그토록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끝내 다시는 보지 못하고 영영 이별을 하고만다.
당나라의 여류시인 '李冶'의 시 '相思怨'이 두향의 심정 이었으리 ~
相思怨 - 원망스런 그리움
人道海水深(인도해수심),不抵相思半(불저상사반)。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 하지만, 내 그리움의 절반도 되지 않네.
海水尚有涯(해수상유애),相思渺无畔(상사묘무반)。
바닷물은 그래도 끝이 있지만, 그리움은 아득하여 한이 없다네.
携琴上高楼(휴금상고루),楼虚月华满(루허월화만)。
거문고 들고 주루에 올라보니, 누각은 비어있고 달빛만 휘황하여,
弹著相思曲(탄저상사곡),弦肠一时断(현장일시단)。
그리움의 노래 타노라니, 줄과 함께 타는 애간장, 한순간에 끊어지네.
그와 함께했던 단양팔경을 두루 둘러 보고는, 그리움에 몸부림 치며 견디어 보지만,
끝내는 100일도 견뎌 내질 못하고 강선대의 바위에서 고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채,
옥순봉 아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저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가 몸을 던진 강선대는 100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지만, 현재는 수몰되어 볼 수가 없다.
장화나루 건너편 말목산 자락에 있는 두향의 묘다.
무연고로 있던 것을 한국 소설계의 큰별 정비석님이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졋다.
댐으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정비석이 단양군수에게 청해서 좀더 높은 곳으로 이장했다.
단양팔경 주위를 한마리의 외로운 학이 배회하며 날고 있다.
혹시 두향이가 학으로 환생하여 날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아직도 구천에서 만나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퇴계가 환생하여 자기무덤을 찾아줄까
하는 바램인지... 500년이 지난 지금도 두향이의 가슴 시린 그리움은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
참고로 ~
2012년 3/25일 KBS 진품명품에서 영,정조때의 문신 조상진(1740~1820)이
과거 급제를 하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단양팔경을 혀행을 하면서 기록한
단양팔경 여행기인 '遊山記'가 최초로 공개되었습니다.
퇴계와 두향의 이야기와 두향묘에 관한 자세한 역사적 기록이 실려있슴.
이렇게 개인 문집들이 발견되면, 역사적 인물들의 사실관계 그리고 조선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단서들을 찾기위해 흥분을 하곤하지요.
이황과 두향과의 사랑이야기는 실제했던 러브스토리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