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풍류 - 성보 김응서
2012년에 북한은 새 우표 7종을 발표했는데 역사의 인물 7 인을 선정하였다.
그들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연개소문 고려의 강감찬, 서희, 이규보, 문익점 조선의 김응서 다.
대부분 武將인데 우리에게는 낯설은 김응서가 누구이며 선정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수 없다.
김응서 (1564~1624, 60세)는 김경서(金景瑞)의 初名으로 1564 년에 평민으로 태어난 그는
1583(선조16)에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얼마나 무예에 출중했는지 짐작된다.
1586년 22세부터 실록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빠른 승진과 함께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전투 - 작자미상 -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하듯이 그는 임진왜란 때 성웅 이순신과 함께 큰 공을 세운 장수였다.
명나라 이여송군대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일의 연합군이 왜군에 빼앗긴 평양성 탈환 작전 때
최선봉 돌격대장으로 대승을 거둔 그 용맹성이 만천하에 알려지므로 평양에서는 큰 영웅이었다.
그 공로로 평안도 병마절도사까지 승진하게 된다.
허나, 그도 이순신과 함께 전쟁상황에는 중용되지만, 조금이라도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끊임없이
신분이 한미하다 하여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가고, 그때마다 멍청한 선조는 그를 좌천시킨다.
한심한 선조가 침략을 당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전란중에 그가 잘못 판단한 것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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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는 세계적으로 역사를 뒤흔든 걸출한 영웅들이 수도 없이 출현했다.
유럽은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일본은 풍신수길, 명나라서는 국운이 쇠하고 후금을 세우게 되는 누루하치가 성장하고 있었으며,
조선에서는 이순신, 사명대사, 율곡 이이,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손곡 이달, 토정 이지함,
동의보감 허준 백호 임제, 김경서, 격암 남사고, 기인 기대승, 송강 정철, 남명 조식 등...
헤아릴수 없는 인재들이 명종,선조때에 봇물처럼 출현하였지만...
도대체 어찌된 건지 선조는 인제를 활용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임진왜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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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경서와 평양기생 계월향의 슬픈 러브스토리 이다.
김경서는 바쁜 전란중에도 늘 계월향을 품에 끼고 다닐 정도로 그녀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계월향 때문에 파직당하기도 하지만, 평양성 전투의 큰 전공으로 복직하기도 한다.
위의 초상화는 구한말 어진 화가인 석지 채용신이 그린 계월향 초상화
얼굴형은 갸름한 고구마형이며 광대뼈가 나오고 볼에서 턱으로 급히 좁아져 턱이 뾰족하다.
코끝도 낮고 귓볼도 약하고, 어쩐지 최고의 평양기생의 아름다움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아래의 초상화도 핍진은 아니듯 하고, 비교해 보면 그 진위 여부를 대략 짐작해 볼수 있다.
위 초상화는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크게 따아 올려 꾸민 머리모양은 1519년 당시의 그림 '花山養老燕圖' 와 같으나 ,
服式은 1800 년대의 강세황의 그림 ' 福川吳夫人' 86세 초상과 저고리,치마, 향노리개가
같은 것으로 봐서 19세기 초에 그렸다는 것을 알수가 있는데... 두 그림의 얼굴이 다르다.
즉, 핍진(逼眞-실제와 같음)이 아닌 추정해서 그린 이상향적인 초상화 임을 알수 있다.
< 1977년 영화 - 정윤희 신성일 임권택, 임진왜란과 계월향 >
아마 모르긴 해도 계월향이 저 정도의 미모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
거물급 사내의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라면 초상화의 인물 보다는
정윤희와 닮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 영화에 출연해 기록을 남겼네요...
조선의 미인형은 많이갸름해 지긴했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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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김경서와 계월향과의 전란중에 벌어지는 사랑은 참으로 애련하다.
님보다 민족을 선택한 계월향과, 사랑보다 평양성을 선택한 두사람 사이의 피를 토하는
비통함이 조선천지를 울린다. 그들의 아름답고도 거룩한 마지막 순간을 조명해 본다.
▶ 평양성 함락되다
1592년 4월 14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20만 대군은 그날로 부산을 함락하고 불과 보름만인
5월 2일 한양마져 점령 당했다. 평양성의 백성들은 공포에 빠져 있었다.
당시 평양기생들은 전국최고의 명성을 얻고있던 '꽃중의 꽃' 이었는데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 여자의 몸으로 우리가 어딜 가겠느냐 ? "
" 나는 차라리 왜장에게 내 한 몸을 맡기겠다 . 내 미모면 그놈들도 혹하고 넘어가겠지 "
" 그 더러운 놈들에게 안기겠다구 ? 나 같으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리겠다 이 미친년아 ! "
왁자지껄 ... 우왕자왕 ....
이때 기방 한구석에는 아무 말없이 상념에 잠겨 잇는 기녀 한 명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계월향(桂月香) 이다. 그녀는 그 당시 김경서의 애첩이었다.
▶ 적과의 동침
평양성을 정복한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는 선봉대 부장인 小西 飛 <고니시 히>에게
평양성을 함락한 공로로 승리자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 말로만 듣던 평양기방은 어떤 곳일까 ! " 라 생각하며, 기방을 찾은 <고니시 히> 는
단박에 계월향의 미모에 빠져 버려 그날 밤 계월향을 취했다.
' 제일 고고한척 하드니 왜장에게 제일 먼저 수청을 드는구나 ! 에이 더러운 년 ~ '
' 김응서 나으리만 불쌍하구나 . 저렇게 지조없는 년이 무슨 평양제일의 기녀라고...'
주위의 수근거림도 아랑곳 않고 계월향은 <고니시 히> 를 극진히 모셨다.
" 숱한 미녀와 지내봤지만 이런 여자는 처음이다 " 고니시 히 는 계월향에게 서서히
사랑의 포로 가 되어 가고 있었다. " 말 만 해다오. 원하는 것 다 들어 주겠다 "
이때 김경서는 성밖에서 평양성 탈환을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계월향에 대한소식도 들려와, 사랑과 배신 그리고 분노까지 감정이 소용돌이 쳐온다.
하지만, 평양성을 지키던 일본군이 명나라의 부대를 전멸(1592.7.17) 시키자
조선군 단독으로 작전수행을 감행해야 하나 전력이 약해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이때, 김경서는 계월향이 보냈다는 한 밀사를 만나 계월향의 진심을 전해 듣고는
그녀의 깊은 심정을 깨달은 후 회한의 눈시울을 적신다.
▶ 김경서 평양성 잠입
계월향은 치밀하게 고니시의 경계심을 허무는데 온갖 지혜와 계략을 짜내었다.
그녀는 고니시 힐에게 자기 오빠 좀 출세시켜 달라고 졸라댔다.
" 제 오빠가 조선군에 있을 때 상관에게 어찌나 구박을 받고 뇌물을 상납하여
조선의 장군들만 보면 치를 떨어요. 해서 일본군의 장수가 되고싶어 한답니다.
" 그래 ㅎㅎ 조선놈들이 그렇지 뭐 ! 부하를 그렇게 다루니 군의 기강이 서나 ! "
" 우리 오빠를 받아 준다면 일본군에서 나으리를 위해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
힘이 장사인데다가 무력도 대단하여 과거에 급재하였으나 신분때문에 뜻을
펴지 못해 한이 맺혀 있었는데 기회만 주신다면 충직한 부하가 될 것입니다 "
" 그래 생각 해 보자 " 고니시는 깊은 생각 끝에 결심을 내린다.
" 계월향이 나에게 지금까지 하는 걸 보면 추호도 속인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빠를 위해 저렇게 간청하는데 ... 그래 허락하자 "
< 철옹성이라 불리던 평양성의 북문 >
계월향은 이때 왜군장교들끼리 암암리에 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응서는 계월향의 지략으로 평양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또한 왜군들에 모범을 보이는데 최선을 다하고, 예를 갖춰 고니시를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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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니시 힐> 의 목을 베다
어느 날 밤 계월향은 어느 때보다 한껏 애교를 부리며 그의 총명을 흐리게 만든다.
고니시 힐은 계월향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몹시 흡족하여 호기를 부리며 술잔을 기울인다.
잔뜩 취한 고니시는 자기 장막으로 가서 잠이들고 말았다. 고니시의 부하들도 술이 취했고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절호의 기회였다.
계월향은 몰래 김경서를 고니시의 장막으로 안내했다.
김경서는 19세에 무과 장원급제한 거구의 무장인데다가, 당시 28살의 힘쎈 장수였다.
기록으로는 고니시가 의자에 앉아 옆구리에 찬 두칼을 잡고 잠을 자고 있었다고 전하며,
김경서의 칼은 지체없이 번개처럼 번쩍했고, 그의 머리는 피를 뿌리며 땅바닥에 뒹굴었다.
머리가 잘려 나가는 그 순간에도 그의 양손은 쌍칼을 뿌렸는데... 하나는 기둥에 꼿히고
또 하나는 장막 밖으로 통과하였다. 고니시 힐은 과연 대단한 장수중의 장수였다.
임진왜란 발발후 1급의 거물급 왜장이 졸지에 목이 잘리는 첫번째의 대사건이었다.
▶ 애첩의 목을 베다
김경서는 준비해둔 한필의 말로 탈출을 시도해야 하는 일촉즉발의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계월향이 비장하게 말한다.
" 나는 말타기도 서툴고, 민첩하지 못하니, 나를 데리고 나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 어차피 죽을 목숨 차라리 나으리의 손에 죽겠소~ 왜놈에게 몸을 더럽힌 나를 용서해주오"
김경서는 피를 토하며 울부 짖엇다.
" 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디있느냐 ? 너를 두고 어찌 나만 갈수 있느냐...그럴수는 없다 "
그러나 계월향은 더욱 더 단호했다.
" 나으리는 살아남아 저 왜놈들을 한명이라도 더 죽이고 저를 따라 오세오. 나으리가 저를
베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수 밖에 없으니 부디... 저를 베어 주세요 ......"
시간이 없다. 결국 애첩 계월향을 베고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평양성을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는 이듬해 1월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공을 세우고 평안병마절도사 까지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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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 한용운의 그녀에 대한 칭송
계월향이여 !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채로 대지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 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살아있는)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 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었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히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 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는 하루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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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서의 비극적인 최후
전쟁이 끝난후 영웅에 대한 조정의 예우는 역시 좋지 않았다.
그는 평안도의 절도사가 아닌 목사직에 전전하고 있었다. 평화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앗다.
목사 재임시 부당한 부역, 황당한 역모에 얽혀 고초를 당하지만 석방되어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그의 용맹성을 잘 아는 광해군이 1618년에 평안 병마절도사로 서북지방의 국경을 맡긴다.
이때 중원땅 에서는 지는 명나라와 뜨오르는 후금(청나라)의 누루하치가 팽팽히 맞서 싸울 때다
임진왜란 때 지원해 준 명분을 구실로 파병을 요청해온 것이다.
조선은 어쩔수 없이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선발 1 만의 병사로 출정하게 된다.
조선조정이 강홍립에게 내린 밀명은 적당히 형세를 봐 지공(遲功)작전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금의 누루하치가 누구인가 ? 세계를 빛낸 걸출한 영웅이 아닌가
신라 경주김씨의 후손이라 알려진 이 영웅에게 명나라는 상대가 되지 못하고 대패한다.
이때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하고 김경서도 따라서 포로가 되고 만다.
이 기간동안 강홍립과 김경서는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분열되고 만다.
강홍립은 누루하치에게 조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조선군의 무사귀환을 요청했다.
이에 반해 김경서는 후금의 정세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비밀리에 조선에 보낼려고 했다.
즉, 김응서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장수였는데 강홍립은 달랐다.
자칫 김경서의 이런 행동이 발각될 경우 후금의 의심은 더 커질 것이고 포로의 석방도 어렵게
본 것이다. 결국 강홍립은 김경서를 밀고 했고, 그는 이국땅에서 비통하게 생을 마감했다.
강홍립 또한 3 년후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선도가 되어 조선에 들어왔다가
역신(逆臣)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 힘없는 나라의 두 장수는 원치 않는 원정에
동원 되었다가 결국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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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쟁은 사랑도 무예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역사다
그리고 전쟁은 무예에 출중한 무장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절대 아니다.
많은 경험과 정보와 지략을 갖춘 노회한 문신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스스로 신라의 후손이라 칭하던 누루하치에게, 신라의 후손국인 조선의 장수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 당시 조정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조롱꺼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