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풍류 세번째 이야기는
고려왕조 500년 역사를 간직한 개성(송도)의 송도삼절(서경덕,황진이,박연폭포)편 입니다.
16세기초 대철인이었던 화담 서경덕과 30년 수행의 살아있는 성불이었다는 지족선사.
두사람에게 조선최고의 팜므파탈 황진이가 과연 어떠한 전략으로 그들을 유혹하는지,
두 남자는 어떻게 그녀의 공격을 방어해 내는지, 조선 최고의 사랑의 승부가 펼처집니다.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먼저~ 송도의 명물 박연폭포 를 감상해 보시죠.
< 개성에 소재한 대흥산성의 북문, 그리고 박연폭포 아래 바위 >
이 바위엔 크고 유려한 초서체로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樂九天'
( 나는 듯 흘러내려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쏱아져 내리는듯 하구나~)
이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중 두 구절이 새겨져 있다.
바위 좌쪽엔 '白詩黃筆兩雄才' (이백 시와 황진의 필체 다 뛰어나다)의 글귀도 있다.
초서 글씨는 조선중기 시인이자 유람가인 '봉래 양사언'의 글씨가 아닐까 싶다...
양사언은 금강산 만폭동의 '蓬萊楓嶽 元化洞天', 雪嶽山 대승폭포 앞 반석의 '九天銀河',
동해 무릉계곡 반석의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 등 명승마다 대형 초서 글씨를 새겼다.
황진이는 오히려 중국 명승을 끌어 들이는 시구절을 비꼬듯
'여산폭포만 좋다고 마라, 해동의 박연이 으뜸이라' 라는
자주적인 내용의 한시(박연폭포시)를 남기고 있다
一派長天噴壑壟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仞水叢叢 (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聳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여산폭포는 중국 강서성 구강현의 여산(양귀비 별장) 에 있는 높이 120m의 3단폭포다.
< 조용히 먹을 가는 황진이, 그러나 밤이 되면 팜므파탈로 변신한다>
黃眞伊 ( ?~? )
중종때의 송도출신으로 자는 明月이다. 황진이가 명월로 이름을 날리면서 유명해 지자
조선말까지 많은 기생들이 명월이란 이름을 사용하면서 기생하면 통상 명월이로 부르면서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황진이는 그 당시 서경덕, 소세양 등과의 교류로 추정해 보면 1506년생 정도로 추정된다.
38세에 죽었다면 1544년이고, 두향이는 1531년생으로 추정되지만 죽은 해는 알수 없는데,
만약 퇴계가 죽은 해(1569)에 따라 죽었다면 그녀 또한 38년을 살았다
미인박명이랄까 중국의 양귀비도 38세에 죽었다. 30대 후반은 미인들의 생사의 기로이다.
그건 그렇고 명월 황진이는 두향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 쟁취하고
최초로 계약결혼을 하였으며, 타고난 미색과 목소리로 뭇 선비들을 맘것 희롱한 희대의
요부였으며, 화장을 안하고도 머리만 빗었을 따름이었으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요즘으로 치면 청아한 목소리의 가수로서, 도화살 끼가 철철 넘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개성의 천마산에 있는 관음사 , 이 사찰의 한 암자에 지족선사가 머물렀다 함 >
황진이는 당시 송도의 生佛로 알려진 高僧, 지족선사를 정복하기 위해 찾아간다.
정비석의 소설에는 살살감기며 애교 떠는 모습들이 있지만, 아래 사진 한장으로 충분하다.
어느날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 얇은 흰저고리와 겉옷만 걸치고 비를 홀딱 맞는다.
그리고 지족선사의 선방으로 냅다 들어가 등을 보이며 젖은 물기는 닦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훽~ 돌아서서 닦아 달라고 수건을 건네며 미소를 보내자 ~
그만~ 그의 유혹에 넘어간 지족선사는 그를 '덥석' 했던 모양이다
아뿔사 "10년공부 도로아미타불" 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족선사 왈 ~
"나는 황진이를 통하여 세간의 허상을 분명히 알았다. 부처께서
인생의 복잡성을 말씀하신 의도를 관념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안것이다.
황진이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 " 라고 하였다. - 정비석의 명기열전에서
===========================================================================
그리고 나서 황진이는 곧바로 송도의 대철인 화담 서경덕을 찾아간다
똑 같은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였으나 그는 목석같았다.
오히려 옷을 홀딱 벗기고는 알몸을 이불속으로 집어 넣는다
그녀는 비에 젖은 한마리의 새가되어 갖은 애교와 신음소리로 그를 유혹하여
결국은 이불속으로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하지만,
밤새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양물을 주물렀으나 그와는 끝내 교합하지 못했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이다
理를 강조한 회재와 氣를 강조한 화담, 두사람 다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수립하여,
뒷날 이언적은 퇴계 이황에게, 서경덕은 율곡 이이 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경덕의 인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송도 인근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가려야할 다툼이 생기면 관청보다 서경덕을 찾았다고 한다.
영의정을 지낸 허엽이나 박순, 그리고 토정 이지함같은 훌륭한 제자가 나올 수 있었다
58세의 임종을 앞둔 서경덕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금 심정이 어떠하신지요?'"
그러자 서경덕은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가 오래여서 마음이 편안하다"고 답했다.
죽음 앞에서도 서경덕의 마음을 편하게 했던 그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차후에 다뤄보기로 합니다.
============================================================================
먼저 지족선사는 가상인물이다
어느정사에도 그의 이름은 없고, 야담집에 나오는 얘기를 소설가들이 인용하였다
이때는 유교이념으로 조선이 건국된지 150년이 지나고 있을때였다
그때 까지도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불교를 믿는 이가 많았다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 교산 허균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숭상하였으니 말이다
불교를 폄하하는 춘화도와 음담패설을 통하여 수없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족선사 왈' 이라는 문장도 불교식이 아니라 유교식의 문장이다.
아마도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의 일환으로 지어낸 야사일 것이라 본다.
그래서 지족선사가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시 한수도 전해진다
十年不下 鷲嶺峰 10년간 취령봉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고
觀色官空 卽色空 색과 공을 관하니 색이공이고 공이생이라
如何曹溪 一滴水 어찌 조계의 한방울 물을
肯墮一葉 紅蓮中 홍련의 한 잎새에 떨어 뜨리겠는가 !
만약 지족선사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마 황진이는 선사를 못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 화담 서경덕이 그녀와 연분을 맺었을 개연성이 훨씬 높다
누가 뭐라하는가 ? 교합했다고 품위가 떨어지거나 인격이 깍이는 것도 아닐진데
이는 필시 불교를 폄하하고, 유교의 교리를 숭상하고자 지어낸 얘기다.
어찌되었건
조선 최고의 요부가 비벼 대는데 견뎌 낸다는 건 성불구자나 가능한 이야기다.
두사람의 연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두사람이 주고 받은 시 한수씩 감상해 봅니다.
화담이 황진이에 대한 여운을 남긴 시 (현대어로 번역한 글)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일이 모두 어리석다
만겹 구름쌓인 성거산에 누가 나를 찿아 오겠는가만
떨어지는 낙엽소리 듣고 혹시 그녀인가 하노라. > 라고 지으니
이에 황진이 화답한 시다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님을 속였겠는가
달 깊은 밤 무엇을 해야겠단 마음이 없이 허전하다
추풍에 나뭇잎 지는 소리를 낸들 어찌겠는가 .> 라고 화답했다
그 뜨거운 육신의 황진이가 마음껏 놀던 때와는 다른 면모가 묻어나는 시다.
황진이의 열정이 식어갈 35세 쯤 지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시다.
'자유로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풍류 - 백호 임제 (0) | 2016.05.13 |
---|---|
사무라이의 전설 (0) | 2016.05.05 |
조선의 풍류 - 단양 8경 (0) | 2016.04.23 |
조선의 풍류 - 함벽루 (0) | 2016.04.21 |
조선상고사 - 장엄한 고구려 (0) | 201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