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학자인 남명 조식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황강에 위치한 천하절경 함벽루(涵碧樓)
풍류객들의 아취가 물신 풍겨나는 함벽루에서 시와 함께 풍류의 진수를 더덤어 봅니다.
푸른 황강의 강물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함벽루의 측면 모습이다.
옛 날에는 강물의 유량이 많아, 비가 올때면 빗물은 처마 끝에서 바로 강으로 떨어지도록 절묘하게
건축한 누각으로 푸른 물에 흠뻑 젖은 누각이란 뜻으로,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 김돈희 글씨다.
색 단장을 하고난 후 여름에 찍은 사진, 다각도로 계절별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함벽루는 합천 8경중 5경으로 수 많은 명사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고려 충숙왕 (1320~)때 김영돈(1285~1348)이 창건하여 여러차례 중건되었으며, 주변 바위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涵碧樓' 란 글씨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처마를 스치고 폭포수처럼 황강으로 떨어진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 樓에 오르면 그 운치가 어떠할까 ?
퇴계 이황은 " 身浮 " 즉 물 위에 붕 ~ 떠 있는것 같다 고 표현했다.
강쪽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제일강산' 이란 현판이 유려하다.
함벽루 내부천정에는 약 2~30 여명의 시인문객들의 편액이 걸려잇다.
그 중에 퇴계와 남명의 시 두편만 소개해 봅니다.
喪非南郭子 - 남곽자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지는 못해도
江水渺無知 - 강물은 흘러 그 끝을 알 수 없네
慾學浮雲事 - 떠도는 구름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 - 가을 바람 불어 와 흩어 놓았네
장자의 재물론에 "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르르 한숨 쉬며 멍하니 있는데,
마치 베필을 잃은 것 같다 " 라는 구절이 있는데 ...
남명 자신도 황강의 아름다움에 빠져 무아지경에 이르렀다는 표현임.
그는 성격이 칼을차고 있는듯 하기도 한 기상이 대단한 선비지만 ,
글씨는 의외로 아주 유려하고 매끄러운게 명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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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래산융기 - 북쪽에는 산이 높이 일어났고
동거수만류 - 동쪽에는 물이 넘쳐 흘러가네
안락빈주외 - 기러기는 호수 밖에 떨어지고
연생죽옥경 - 연기는 처마 위로 올라오네
한욕지의원 - 한가로이 찾아오니 뜻은 아득하고
고의각신부 - 높게 기대 서니 뜬 것 같네
신미명강반 - 다행이 명강에 벗어나 있어서
유능임거유 - 아직 능히 왕래가 자유 롭네.
퇴계 이황의 글씨체는 조맹부체를 본받아서 정갈하고 단정하다.
좌측 부연에는 임술년 청화월 1562년 4월 이다. 퇴계 61세 樓를 중건할 때 지은 시가,
그의 유고문집에 있는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고 쓰여있다.
두 사람은 1501년 닭띠 동갑내기로 퇴계는 경북 예안 청량산 자락에서,
남명은 경남 합천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세상은 이 둘을 동도공경 이라 했다.
두사람은 출처관 (出處觀)에서 너무나 많이 달랐다.
퇴계가 인의(仁義)를 숭상한 후덕한 인품과 매화를 사랑한 심성의 소유자 였다면,
남명은 경의(敬義) 를 중시한 시퍼렇게 날이 선 패도(佩刀)를 찬 기상의 소유자 였다.
퇴계는 학자와 관료를 병행하며 주자학의 이론연구에 매진했다면,
남명은 초야에서 일생을 보낸 처사형 선비로 이론보다는 삼강오륜의 실천을 중시했다.
남명은 " 왜놈은 목을 뽑아버려야 된다 " 고 할 만큼 기상이 정말로 대단하였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 하나만 소개해본다.
당시 조정의 정치 실세는 문정왕후와 그의 오빠 윤원형 그리고 희대의 요부 정난정 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윤원형의 졸개들이 합천 황강에 놀러 와서는 질퍽거리고 행패를 부리자 ~
그들을 물속에 집어넣어 초죽음 시켜 혼을 내어 쫒아내 보내자 .... 윤원형에게 일러 바친다.
윤 왈 "혹시~ 그가 남명 조식이라 하더냐 ? " " 네 ~ 그러하다 했사옵니다 "
" 내 이름(윤원형)을 아룃는 데도 그러하드냐 ? " " 네 ~ 소용이 없었습니다 "
....... 없던 일로 하라 ~ 고 했다고 한다 . 윤원형도 남명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함벽루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연호사
대야성 전투에서 사위인 성주와 함께 딸을 잃은 김춘추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함벽루에 안개가 자욱해 지면 왠지~ 마음이 울적해 진다.
조선 조준 (趙浚)의 시 한 수 더 읊지 않을 수 없다.
駿馬悠悠獨上樓(준마유유독상루) : 말을 타고 유유히 누대에 올라 보니
風塵宇宙十年愁(풍진우주십년수) : 풍진 가득한 세상에 십년 근심 이는구나
根無諸葛開平策(근무제갈개평책) : 제갈량의 재주 없어 평정할 계책 열지 못해
橫槊高吟芳草洲(횡삭고음방초주) : 창을 비껴 들고 큰소리로 호수에 읊조린다.
멀리 강건너에서 바라본 함벽루와 연호사의 호젓한 가을풍경
함벽루의 겨울 설경은 세상사 모든 시름을 잊게 할 만큼 절경의 풍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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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남명의 여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다
조선시대 한 짖굿은 선비가 명망이 높았던 남명 조식 선생을 찾아 가서,
" ㅂㅈ (여성의 성기)가 도대체 무었입니까 ? " 라고 묻자
남명은 얼굴을 찌푸리며 상대하지 않았다. 선비가 또 다시 묻기를
" ㅈㅈ (남성의 성기)는 무었입니까 ? " 하고 재차 묻자
남명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들을 시켜 그를 내 쫒았다. 그러자
그 선비가 이번에는 역시 명망이 높은 퇴계선생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하니,
곰곰이 생각하드니 " 步藏之者 而寶而不市者也 "
" 座藏之者 而者而不兵者也 " 라 하였다.
보ㅈ 는 걸어다닐 때 숨어 있는 것으로 보배처럼 귀하지만 살 수는 없는 것이고,
자ㅈ 는 앉아있을 때 숨어 있는 것으로 사람을 찌르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이를 본 선비는 남명보다 퇴계의 덕이 더 높다고 하였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두 사람의 학문과 사상관은 여러곳에서 부딪혀 수 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 중략 ~
남명 조식도 애첩을 두어 평소에는 정이 두터웠는데 ...
남명이 임종시에 그의 애첩이 작별인사를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 ' 는
유교 경전 "禮記" 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애첩만 불쌍하게 되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은 달랐다. 그의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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