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글

조선의 풍류 - 함벽루

낙천지명 2016. 4. 21. 17:03


조선의 대학자인 남명 조식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황강에 위치한 천하절경 함벽루(涵碧樓)

풍류객들의 아취가 물신 풍겨나는 함벽루에서 시와 함께 풍류의 진수를 더덤어 봅니다.   


 

 

푸른 황강의 강물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함벽루의 측면 모습이다.

옛 날에는 강물의 유량이 많아, 비가 올때면 빗물은 처마 끝에서 바로 강으로 떨어지도록 절묘하게

건축한 누각으로 푸른 물에 흠뻑 젖은 누각이란 뜻으로,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 김돈희 글씨다. 


 

 

 

색 단장을 하고난 후  여름에 찍은 사진, 다각도로 계절별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함벽루는 합천 8경중 5경으로 수 많은 명사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고려 충숙왕 (1320~)때 김영돈(1285~1348)이 창건하여 여러차례 중건되었으며,  주변 바위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涵碧樓' 란 글씨와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처마를 스치고  폭포수처럼 황강으로 떨어진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   樓에 오르면 그 운치가  어떠할까  ?

퇴계 이황은  " 身浮 " 즉  물 위에 붕 ~ 떠 있는것 같다 고  표현했다.  

 

 

 

 강쪽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제일강산' 이란 현판이 유려하다.

 

 

  

함벽루 내부천정에는  약 2~30 여명의 시인문객들의 편액이 걸려잇다.  

그 중에 퇴계와 남명의 시 두편만 소개해 봅니다. 

 

 

 

喪非南郭子  -  남곽자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지는 못해도  

 江水渺無知  -  강물은 흘러 그 끝을 알 수 없네               

 慾學浮雲事  -   떠도는 구름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  -  가을 바람 불어 와 흩어 놓았네                

 

장자의  재물론에 "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르르 한숨 쉬며 멍하니 있는데, 

마치 베필을 잃은 것 같다 " 라는 구절이 있는데 ...    

남명 자신도 황강의 아름다움에 빠져 무아지경에 이르렀다는 표현임.   

그는 성격이 칼을차고 있는듯 하기도 한 기상이 대단한 선비지만 ,  

글씨는 의외로 아주 유려하고 매끄러운게  명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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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래산융기 - 북쪽에는 산이 높이 일어났고

동거수만류 - 동쪽에는 물이 넘쳐 흘러가네

안락빈주외 - 기러기는 호수 밖에 떨어지고

연생죽옥경 - 연기는 처마 위로 올라오네   

         한욕지의원 - 한가로이 찾아오니 뜻은 아득하고   

고의각신부 - 높게 기대 서니 뜬 것 같네     

      신미명강반 - 다행이 명강에 벗어나 있어서      

   유능임거유 - 아직 능히 왕래가 자유 롭네.    

 

퇴계 이황의 글씨체는 조맹부체를 본받아서 정갈하고 단정하다. 

좌측 부연에는 임술년 청화월  1562년 4월 이다.  퇴계 61세 樓를 중건할 때 지은 시가,

그의 유고문집에 있는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고 쓰여있다.    

 

  

 

 

두 사람은 1501년 닭띠 동갑내기로 퇴계는 경북 예안 청량산 자락에서, 

남명은 경남 합천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세상은 이 둘을 동도공경 이라 했다.

두사람은 출처관 (出處觀)에서 너무나 많이 달랐다.

 

퇴계가 인의(仁義)를 숭상한 후덕한 인품과  매화를 사랑한 심성의 소유자 였다면,  

남명은 경의(敬義) 를 중시한 시퍼렇게 날이 선 패도(佩刀)를 찬 기상의 소유자 였다.

퇴계는 학자와 관료를 병행하며 주자학의 이론연구에 매진했다면,   

남명은 초야에서 일생을 보낸 처사형 선비로 이론보다는 삼강오륜의 실천을 중시했다.

 

남명은 " 왜놈은 목을 뽑아버려야 된다 " 고 할 만큼 기상이 정말로 대단하였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 하나만 소개해본다.

   당시 조정의 정치 실세는 문정왕후와 그의 오빠 윤원형 그리고 희대의 요부 정난정 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윤원형의 졸개들이 합천 황강에 놀러 와서는 질퍽거리고 행패를 부리자 ~

그들을 물속에 집어넣어 초죽음 시켜 혼을 내어 쫒아내 보내자 .... 윤원형에게 일러 바친다.

윤 왈 "혹시~ 그가 남명 조식이라 하더냐 ? "   "  네 ~ 그러하다 했사옵니다 "  

" 내 이름(윤원형)을 아룃는 데도 그러하드냐 ? "  "  네 ~ 소용이 없었습니다 " 

....... 없던 일로 하라 ~  고 했다고 한다 .   윤원형도  남명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함벽루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연호사

대야성 전투에서  사위인 성주와 함께 딸을 잃은 김춘추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함벽루에 안개가 자욱해 지면   왠지~  마음이 울적해 진다.

조선  조준 (趙浚)의 시 한 수 더 읊지 않을 수 없다.


 駿馬悠悠獨上樓(준마유유독상루) : 말을 타고 유유히 누대에 올라 보니       
風塵宇宙十年愁(풍진우주십년수) : 풍진 가득한 세상에 십년 근심 이는구나
    根無諸葛開平策(근무제갈개평책) : 제갈량의 재주 없어 평정할 계책 열지 못해
     橫槊高吟芳草洲(횡삭고음방초주) : 창을 비껴 들고 큰소리로 호수에 읊조린다. 

 

 

 

멀리 강건너에서 바라본 함벽루와 연호사의 호젓한 가을풍경 


 

 

함벽루의 겨울 설경은  세상사 모든 시름을 잊게 할 만큼 절경의 풍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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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와 남명의  여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다

 

조선시대 한 짖굿은 선비가  명망이 높았던 남명 조식 선생을 찾아 가서, 

"  ㅂㅈ (여성의 성기)가 도대체 무었입니까 ?  " 라고 묻자 

남명은 얼굴을 찌푸리며 상대하지 않았다.  선비가 또 다시 묻기를

" ㅈㅈ (남성의 성기)는 무었입니까 ? "  하고  재차   묻자

남명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들을 시켜 그를  내  쫒았다.   그러자

 

그 선비가 이번에는 역시 명망이 높은 퇴계선생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하니,

곰곰이 생각하드니  " 步藏之者 而寶而不市者也 "                       

                " 座藏之者 而者而不兵者也 "  라 하였다.

         

 보ㅈ 는 걸어다닐 때 숨어 있는 것으로 보배처럼 귀하지만  살 수는 없는 것이고,

 자ㅈ 는 앉아있을 때 숨어 있는 것으로 사람을 찌르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이를 본 선비는 남명보다 퇴계의 덕이 더 높다고 하였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두 사람의 학문과 사상관은 여러곳에서 부딪혀  수 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 중략 ~

 

남명 조식도 애첩을 두어 평소에는 정이 두터웠는데 ... 

남명이 임종시에 그의 애첩이 작별인사를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 '

    유교 경전 "禮記" 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애첩만 불쌍하게 되었다.

 

                      그러나  퇴계 이황은 달랐다.  그의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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