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 김병연 (蘭皐 金炳淵, 1807~1863, 56세) 김삿갓 편입니다.
중국에 시선 李伯이 있다면 우리 조선에는 金笠(방랑시인 김삿갓)이 있다.
그의 해학과 재치 넘치는 풍자시와 일화들을 읽노라면,
가히 ~ 조선 일등풍류객의 재능을 갖춘 천재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 세도가인 안동이 본관이라 선대가 명문 중의 명문가인 셈이다.
그가 어릴적 조부 김익순은 지금의 군 사단장급에 해달하는 선천에 부사로 있을 때 ,
홍경래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항복한 죄를 물어 처형을 당한다.
그렇게 되자 그의 부친은 홧병으로 죽고 가문은 몰락했다.
그후 모친에 의해 삼형제가 뿔뿔히 흩어져 황해곡부, 경기여주, 강원영월 등에 숨어 살게 된다.
그는 20세때 영월 백일장에 장원급제하지만, 선대의 내력을 알고부터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든다.
만약, 그가 멸문지화 당하지 않고 한 시대를 살았다면 더욱 멋있는 풍류시인으로
살았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천재시인의 불운한 인생이었다.
그가 남긴 풍자시 중의 걸작으로 꼽는 구비육담시(口碑肉談詩) 한수 감상해 보지요.
강원도 시골 서당에 들러 하루밤 유할것을 청하나 훈장은 본체 만체 대꾸가 없다.
화가 난 김삿갓이 몰래 써서 학동에게 크게 읽어라 하고 자리를 떠난다.
書 堂 乃 早 知 (서당 은 내 조지) 요. => 서당이 있슴을 내 일찍 알고 왔거늘
生 徒 諸 未 十 (생도 는 제미 십) 이라 => 생도는 채 열명도 안되는 구나 !
房 中 皆 尊 物 (방중 은 개 존물) 이고 => 방안에 다 잘난체 하는 물건들 뿐인데
先 生 奈 不 謁 (선생 은 내 불알) 이다. => 선생은 어찌 알현도 아니하는가 ?
그의 기행과 구비육담시는 막힘없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어느날 속리산 법주사에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스님들이 뭔가 고심하는 걸 눈치 채고 물은 즉아래 마을 큰 세력가인 具氏가 족보를 만드는데
절의 종이를 외상으로 가져가 갚지 아니 한단다.
김삿갓이 이를 해결해 준다며 시를 써 보냈는데 내용이 가관이다.
法住寺僧徒造紙爲業 - 법주사 승도 조지 위업
基造紙盡入立於具氏譜紙 - 기 조지진입 입어 구씨 보지
小譜紙有價況次大譜紙乎 - 소 보지 유가 황차 대 보지 호 - 풀어보면
법주사 승들은 종이 만드는 것이 업인데,
그 많던 종이가 구씨 족보용지로 들어 갔다네~
작은 족보도 값이 있는데, 하물며 대동보 족보에 있어서랴 ...
말은 맞지만 구문으로 들으면 기가 막히는 쌍소리라~ 스님들이 걱정했지만,
구씨는 아무소리 못하고 얼른 종이 값을 갚았다 한다.
하루는 김삿갓이 어떤 여인과 정을 통한후 장난기가 발동해 던진 농담에,
재치있게 대꾸하는 한 여인의 절묘한 연시도 전해져 온다.
毛深內闊 必過他人 (모심내활 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필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 갔으리 ~ 라고 하자
溪溪楊柳 不雨長 (계계양류 불우장 )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않아도 저절로 자라고,
後院黃栗 不蜂柝 (후원황률 불봉탁)
뒷마당의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노라 ~ 고 화답했다 한다.
김삿갓은 수많은 육담과 구비문학을 남겼으며, 전국 곳곳에서는 지금도 그의 시로 짐작되는
구비문학들이 전해져 오고 발견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약 200명의 시인과 평론가들이 그의 시를 학술지에 발표 할만큼 훌륭한 족적을 남긴
대 방랑시인 이었으나, 청운의 꿈을 펴지 못하고 불운하고 고단하게 살다간 그가 안타깝다.
그는 늘 차갑고 어눌진 곳을 헤메이는 생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다행이 양지바른 언덕에 누웠다.
강원도 영월 ... 김삿갓 기념공원 한켠에 자리잡은 방랑시인 김병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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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김삿갓)의 장원급제 시
※김삿갓 김병연이 조부 김익순의 불충을 탄액하는 시를 써 장원급제하다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一爾世臣金益淳(일이세신금익순)-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鄭公不過卿大夫(정공부과경대부)-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將軍桃李농西落(장군도리농서락)-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烈士功名圖末高(열사공명도말고)-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詩人到此亦慷慨(시인도차역강개)-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撫劍悲歌秋水溪(무검비가추수계)-칼을 만지며 이 가을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宣川自古大將邑(선천자고대장읍)-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比諸嘉山先守義(비제가산선수의)-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淸朝共作一王臣(청조공작일왕신)-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死地寧爲二心子(사지영위이심자)-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升平日月歲辛未(승평일월세신미)-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風雨西關何變有(풍우서관하변유)-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尊周孰非魯仲連(존주숙비노중련)-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輔漢人多諸葛亮(보한인다제갈량)-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同朝舊臣鄭忠臣(동조구신정충신)-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抵掌風塵立節死(저장풍진입절사)-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嘉陵老吏揚名旌(가릉노리양명정)-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生色秋天白日下(생색추천백일하)-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魂歸南畝伴岳飛(혼귀남무반악비)-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骨埋西山傍伯夷(골매서산방백이)-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西來消息慨然多(서래소식개연다)-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問是誰家食錄臣(문시수가식록신)-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家聲壯洞甲族金(가성장동갑족금)-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名字長安行列淳(명자장안항렬순)-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家門如許聖恩重(가문여허성은중)-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百萬兵前義不下(백만병전의부하)-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淸川江水洗兵波(청천강수세병파)-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鐵甕山樹掛弓枝(철옹산수괘궁지)-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吾王庭下進退膝(오왕정하진퇴슬)-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背向西城凶賊脆(배향서성흉적취)-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魂飛莫向九泉去(혼비막향구천거)-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地下猶存先大王(지하유존선대왕)-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忘君是日又忘親(망군시일우망친)-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一死猶輕萬死宜(일사유경만사의)-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春秋筆法爾知否(춘추필법이지부)-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此事流傳東國史(차사유전동국사)-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암울한 시대지만 조선 최고 지식인의 수준을 가늠해 볼수 있는 명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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